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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준기(경북대), 박찬부(경북대)

I. 들어가는 말


        라깡과 프로이트 정신분석의 임상적 철학적 논의는 정신분석의 정치성의 확립에 어떻게 기여했으며, 보다 넓게는 현대의 정치적 문화적 지형을 분석함에 있어 어떤 실천적·이론적 대안의 가능성을 제공하는가? 라깡 정신분석과 관련해 논의할 수 있는 주제들은 무수히 많지만 이 글에서는 무엇보다도 성적 주체성과 정치의 문제에 집중해 논의를 진행하고자 한다. 주지하듯이 알튀세르는 호명에 의한 주체화는 곧 지배 권력에의 종속을 의미하며, 라깡 역시 주체화는 상징적 질서에 의한 소외 과정과 일치한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하지만 알튀세르나 라깡만이 이러한 주제를 논의한 것은 아니었고 주체화와 권력, 종속화의 문제는 마르크스, 마르쿠제, 아도르노, 푸코 등 수많은 사상가들의 관심 대상이었다. 하지만 특히 성적 주체와 권력에 관한 문제에 대해 정신분석적 접근이 반드시 필요한 이유는 정신분석은 그 학문적 특성상 주체 문제를 추상적인 공간이 아니라 성구분 혹은 성정체성이라는 보다 구체적인 맥락 속에서 고찰하고 있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정신분석은 주체화의 구체적인 메커니즘을 분석적으로 설명하는 것을 자신의 중요한 학문적 과제 중 하나로 삼는다. 푸코나 알튀세르를 포함한 기존의 철학적 담론은 주체화와 종속의 문제를 주로 추상적인 차원에서 다루기 때문에 주체성 형성의 현실적, 정치적 의미를 구체적으로 밝히지 못했다면 정신분석은 이러한 문제에 대해 보다 구체적인 접근을 가능케 해 주었다(예컨대 동일화 메커니즘).
  
        이러한 맥락에서 버틀러의 『권력의 심리적 삶(The Psychic Life of Power)』은 이 글의 관심사와 관련해 시사하는 바가 매우 크다. 버틀러는 알튀세르, 푸코의 문제 의식을 출발점으로 삼아 니체, 헤겔 등 고전 철학으로부터 영감을 얻었으며, 정신분석(프로이트, 라깡)의 개념을 통해 주체의 동일화 메커니즘을 보다 구체적으로 설명하려고 노력한다. 앞으로 자세히 살펴보겠지만 그녀는 주체의 성립과정을 ‘멜랑콜리적 동일화’라는 개념으로 이론화한다. 일반적으로 버틀러는 푸코주의자로 알려져 있으며, 이러한 자신의 입장에 따라 (푸코와 마찬가지로) 정신분석에 대해 매우 비판적인 입장을 취해왔다. 하지만 (필자가 아는 한) 적어도 『권력의 심리적 삶』에서는 이러한 정신분석에 대한 극단적인―그리고 상당부분 정당하지 못했던―비판적 입장이 대폭 완화된다. “종속(subjection)을 통해 주체 형성과 예속(subordination)이 동시에 생겨난다는 푸코의 가정은 우리가 다음의 사실, 즉 주체가 그 혹은 그녀[주체]가 근본적으로 종속하고 있는 사람들에 대한 열정적 애착(passionate attachement)을 갖고 있지 않다면 어떤 주체도 존재하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을 고려할 때 특수한 정신분석적 의미를 획득한다.” Judith Butler, The Psychic Life of Power, Theories in Subjection, Standord: Standford University Press, p.7. 강조는 필자.  

        이제 이하에서 버틀러의 ‘멜랑콜리적 동일화’ 이론과 이를 통한 버틀러의 성적 본질주의와의 정치적 투쟁의 의미를 살펴본 후, 프로이트·라깡적 관점에서 이를 비판적으로 분석해보고자 한다. 그리고 이어서 라깡이 말하는 분석의 끝을 명확히 정의함으로써 정신분석의 정치성의 의미를 보다 분명하게 부각시키고자 한다.



II. 버틀러의 ‘멜랑콜리적 동일화’:
        
        정신분석이 말하는 주체 형성과 그것의 정치적 의미를 결합시키는 작업을 하면서 버틀러가 더욱 관심을 갖고 있는 문제는 ‘젠더의 정치학’이다. 버틀러의 입장을 명확하게 파악기 위해 먼저 그녀의 기획을 정리해보자. 그녀의 기획은 한마디로 ‘성적 본질주의 비판’이라고 요약할 수 있다. 이성애적 성적 실천을 옹호하며 그것을 유일한 성적 규범으로 만드는 가부장적 성이론(예컨대 오이디푸스 콤플렉스 이론)을 극복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 버틀러는 생물학적 이데올로기 혹은 가부장이데올로기가 선재하는 어떤 영구불변한 본질의 ‘표현’으로 간주하는 성 개념을 해체하고자 한다. “젠더를 ‘표현한다’고 간주되는 성(sexuality) 개념에 반대해 우리는 여기에서 젠더 그 자체는 정확히, 성에서 명확히 표출되지 않은 채 남아있는 것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이해하고자 한다.” Ibid., p.140. 강조는 원문. 요컨대, 그녀는 이성애적 성적 실천을 유일한 규범으로 간주하는 현대의 이데올로기적 상황에 대항해 (여자) 동성애적 성적 실천을 옹호하고자 하며, 이 점에서 그녀의 기획은 여성주의의 중요한 한 흐름을 형성한다. 버틀러의 입장이 나름대로의 독자성을 가지며 흥미로운 이유는 자신의 이러한 ‘정치적’ 관심사를 주체 형성, 성정체성, 지배와 종속이라는 보다 넓은 틀 속에서 정신분석적으로, 이론적으로 철저하게 해명하려고 노력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버틀러는 “종속(subjection)을 통해 주체 형성과 예속(subordination)이 동시에 생겨난다는 푸코의 가정”에 대한 정신분석적 ‘검증’을 어디에서 발견하는가? 여기에서 버틀러는 프로이트의 ‘상실한 대상과의 동일화’라는 개념에 의존한다. 프로이트에 따르면 멜랑콜리 환자의 극단적인 “자기 비난”은 “사랑의 대상에 대한 비난”이다. S. Freud 1917(1915), Trauer und Melancholie, p.202. “대상에 대한 나르시시즘적 동일화가 사랑[대상]에 대한 점령(Liebesbesetzung)을 대체한다.” Ibid., p.203. “우리는 다른 곳에서 동일화가 대상 선택의 전단계이며, [동일화는] 자아가 대상을 부각시키는 최초의…양가적인 방법이라는 것을 보여준 바 있다. 자아는 대상을 자신 속으로 병합(einverleiben)시키기를 원한다. 그것도 리비도 발달의 구순적 혹은 식인적 단계에 상응해 먹어치우기라는 방법으로 말이다.” Ibid., p.203-204. 요컨대 프로이트에 따르면 멜랑콜리적 주체 형성을 위한 조건은 “대상 상실, [사랑과 증오의] 양가성, 자아로의 리비도 퇴행”이다. Ibid., p.211.

        버틀러는 상실한 대상과 나르시시즘적으로 동일화해 자아가 형성된다는 프로이트의 착상을 이어받아, 「애도와 멜랑콜리(1917[1915])」, 「나르시시즘의 도입을 위하여(1914)」, 「자아와 이드(1932)」등을 상세히 논평하며, ‘멜랑콜리적 동일화’를 통해 주체가 형성된다는 논제를 발전시킨다.

        버틀러는 우선, 프로이트가 말하는 '상실한 대상과의 동일화'에 ‘논리적’ 질문을 덧붙인다. 상실한 대상과의 동일화를 통해 자아 혹은 주체가 형성된다면, 상실한 대상과의 동일화가 발생하기 전에 자아 혹은 주체는 이미 존재하는가? 상징계와 상징계가 도입한 결여를 받아들임으로써 주체와 주체의 현실이 비로소 형성된다는 라깡의 접근방식과 유사하게 버틀러는 이렇게 말한다. “대상으로부터 자아로의 방향 전환은 그것들[대상과 자아][의 형성 자체를] 가능케 하며, 분열, 분리 혹은 상실을 각인시키고 처음으로 자아를 형성하는 운동이다.” J. Butler, The Psychic Life of Power, Theories in Subjection, op. cit., 170.  “멜랑콜리적 방향 전환을 통해서 비로소 외부세계와 내부세계의 분화가 일어난다면, 멜랑콜리는 심리적인 것과 사회적인 것 사이에 유동적인 경계선, 즉 사회적 통제를  위한 지배 규범과 관련해 심리적 영역을 배분하고 규율하는 경계선을 처음으로 만들어낸다.” Ibid., p.171. 여기에서 볼 수 있듯이 버틀러는 주체 형성의 최초 메커니즘과 그것의 구체적 모습을 설명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그렇다면 멜랑콜리가 “지배 규범과 관련해 심리적 영역을 배분하고 규율하는 경계선”을 만들어 낸다는 것이 버틀러에게 구체적으로 의미하는 것은 무엇인가? 앞에서 언급했듯이 버틀러의 주요 관심사는 이성애를 성적 실천의 유일한 규범으로 간주하는 가부장이데올로기, 그리고 궁극적으로 젠더를 고정된 영구불변의 본질로 간주하는 ‘성적 본질주의’를 해체하는 것이다. 이러한 관심사는 『젠더 트러블(Gender Trouble)』이라는 저서에서 집중적으로 논의되었는데, 『권력의 심리적 삶』에서 멜랑콜리적 동일화라는 맥락에서 보다 이론적으로 다시 다루어진다. 『젠더 트러블』에서 “나는 젠더는 수행적(performative)이라고 주장했다. 이것은 젠더가 행동, 제스처 혹은 말에 의해 ‘표현’되지만, 이러한 젠더의 수행은 젠더라는 내적인 핵이 존재한다는 착각을 사후적으로 만들어낸다는 것을 의미한다.” Ibid., p.144. 버틀러의 멜랑콜리적 동일화 이론은 이렇듯 본질의 표현으로서의 젠더라는 이데올로기적 사고를 비판하기 위한 목적을 가지고 있다.

        그렇다면 이성애적 규범은 어떻게 생겨나는가? 여기에서 버틀러는 한편으로는 정신분석에 의존하면서, 동시에 정신분석적 논의를 넘어서는 논제를 발전시키고자 노력한다. Ibid., p. 138 참조. 버틀러에 따르면 이성애적 성적 본질주의는 무엇보다도 동성애의 상실을 ‘부인’함으로써 형성된다.

        먼저 여자아이의 예를 들어 설명해보자. 어떻게 여자아이는 정상적인(straight) 여자가 되는가? 버틀러에 따르면 여자아이의 최초의 사랑 대상은 여자(어머니)인데 여자아이의 최초 사랑 대상도 어머니라는 논제는 동시에 프로이트의 견해이기도 하다. , 여자아이는 이 최초의 사랑대상을 포기한 후, 즉 동성애적 애착을 포기한 후 그녀와 동일화하고 남자(아버지)를 새로운 사랑 대상으로 선택함으로써 이성애자가 된다.

“이성애는 금지를 통해 형성된다. 그리고 이러한 금지는 동성애적 애착을 금지 대상의 하나로 삼으며 이를 통해 이러한[동성애적] 애착의 상실을 강요한다. 여자아이가 사랑을 아버지로부터 아버지의 대체자(substitute object)에게 전이시켜야 한다면, 그녀는 프로이트의 논리에 따르면 먼저[아버지에 대한 사랑을 포기하기 전에] 어머니에 대한 사랑을 포기해야 했다. 그리하여 [사랑의] 목적과 대상은 배척되어야(foreclosed) 했다. 그녀는 저 동성애적 사랑을 다른 대체적 여성에게 전이해서는 안 되고 동성애적 애착 자체를 포기해야 한다. 단지 이러한 조건 하에서만 이성애적 목적이…설립된다. 단지 이러한 조건 하에서만 아버지, 그리고 아버지의 대체자가 [여자아이의] 욕망 대상이 될 수 있고 어머니는 동일화를 위한 불편한 장소가 된다.” Ibid., p.137. 강조는 필자.

        여자아이의 경우, ‘정상적인’ 이성애는 최초의 사랑 대상(동성)에 대한 “열정적 애착(passionate attachement)”을 부인함으로써, 달리 말하면 최초의 사랑 대상 상실을 “애도하기(grieve)”를 거절함으로써 형성된다. “정상적인(straight) 여자는 그녀가 ‘결코’ 사랑한 적이 없으며 따라서 ‘결코’ 애도한 적이 없는 여자가 된다.” Ibid., p.147. 강조는 원문. “결코 사랑한 적이 없으며, 따라서 결코 상실한” 적도 없다는 “이중의 부인(double disavowal)”이 “이렇듯 소위 이성애적 주체를 만들어낸다. 그것은 애착을 인정하기를 거부하고 따라서 애도하기를 거부하는 것에 근거한 [성적] 정체성이다.” Ibid., p.139-140.  강조는 필자. 따라서 “[이성애적] 젠더 그 자체는 해결되지 않은[행해지지 않은] 애도의 ‘행위하기(acting out)이다.” Ibid., p.146.
        .
        버틀러에 따르면 동성애적 사랑에 대한 이중의 부인을 통해 이성애적 주체가 형성되는데, “멜랑콜리적 동일화” Ibid., p.136.는 바로 이러한 이성애적 주체의 성립을 가능케 하는 동일화이다. 그리고 버틀러는 이러한 이성애적 정체성을 형성하는 멜랑콜리를 “젠더 멜랑콜리” Ibid., p.140. 강조는 필자.라고 부른다. 이러한 버틀러의 설명은 상실한 대상과의 동일화라는 프로이트의 설명과 일맥상통하며, 위의 인용문에 등장한 배척(foreclosure)라는 표현에서 알 수 있듯이 버틀러는 멜랑콜리적 주체 형성을 설명하기 위해 라깡이 도입한 배척 개념을 원용한다.

        논의를 더 진행하기 전에 버틀러의 ‘정신분석’이 갖는 정치적 의미를 정리해보자. ① 동성애적 사랑 대상을 애도함으로써 성적 본질주의를 비판하고 이를 통해 동성애적 실천을 옹호. ② AIDS 사망자 같은, 애도 받지 못한 죽음을 위한 개입. “애도를 언표하지 않는 한, 상실은 인정되지 않음으로써 이것[상실]에 대한 분노는 배가된다. 그리고 이러한 분노가 공적으로 금지된다면 그러한 금지의 멜랑콜리적 효과는 자살로 이끌 수 있다.” Ibid., p.148. ③ 주체와 타자의 관계에 대한 정신분석적 설명. 금지규범, 상실, 동일화와 관련해 이성애적 혹은 동성애적 주체 형성을 설명함으로써 사회적 맥락에서의 성적 주체 형성의 구체적 메커니즘 제시.

        그렇다면 특히 성적 주체의 형성과 관련해 버틀러의 입장은 얼마만큼 정신분석적으로 정당화될 수 있으며, 어느 정도 라깡과 프로이트 입장과 일맥상통하며 다른 점이 있는가?  



III. 라캉과 프로이트 관점에서의 비판적 고찰

        여기에서 우리는 정신분석에 대해 비판적인 모든 이론들이 그렇듯이 버틀러도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에 근거하지 않는 이론 구성을 위해 노력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버틀러에 따르면 멜랑콜리적 동일화를 유발시키는 궁극적 원인은 동성애에 대한 금지이다.

“여성성의 획득과 남성성의 획득이 항상 보잘 것 없는 이성애의 성취를 통해 이루어진다면, 우리는 이러한 성취[를 추동하는] 힘을, 동성애적 애착의 포기를 명령하거나 혹은 동성애적 애착의 가능성을 더욱 강력하게 미리 저지하는 힘으로 [이해한다], 즉 살아남을 수 없는 열정이며 애도 불가능한 상실인 동성애 영역을 산출할 가능성의 ‘배척(foreclosure)’으로 이해한다. 이 이성애는 단지 근친상간 금지를 부과함으로써가 아니라 그것에 앞서 동성애 금지를 강요함으로써 형성된다. 오이디푸스적 갈등은 이성애적 욕망이 이미 완성되었고 이성애와 동성애의 구분(궁극적으로 이것은 어떤 필연성도 없는 구분이다)이 이미 강요되어 있다는 것을 전제한다. 이런 의미에서 근친상간 금지는 동성애 금지를 전제한다. 그것[근친상간 금지]은 욕망이 이미 이성애화 되었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Ibid., p.135. 작은 따옴표 강조는 필자. 또한 다른 곳에서 버틀러는 이렇게 말한다. “그러나 육체의 정치학이 명백히 드러난 텍스트와 표면에 드러나지 않은 텍스트를 결정하는 것은 무엇인가? 젠더의 육체적 양식, 젠더화된 육체가 상상 속에 드러나는 모습과 상상된 모습을 생성하는 금지법은 무엇인가? 의심할 여지없이 프로이트는 그것을 젠더의 정체성이 생성되는 순간, 즉 젠더가 고정되는 … 순간으로서 동성애를 반대하는 … 근친상간 금기라고 지적한다. …이와 같이 규율적인 젠더의 산출은 이성애적 구조와 섹슈얼리티의 규제를 위하여 젠더가 허위로 고정되는 결과를 가져온다.”(버틀러 1998, 「성차의 문제점과 페미니스트 이론, 그리고 정신분석적 담론」, 『세계 사상 제4호: 차이의 정치학: 페미니즘의 다양한 목소리』, 동문선,  1998, (“Gender Trouble, Feminist Theory and psychoanalytic Discourse” in Feminism/Postmodernism, Linda J. Nicholson ed.), p.72.

        하지만 과연 버틀러의 입장은 유지될 수 있는 타당한 주장인가? 프로이트·라깡적 관점에서 버틀러의 이론을 비판적으로 검토해보자.

        첫째, 과연 버틀러가 말하듯이 동성애 금지가 이성애 금지보다 더 우선적인 금지규범인가? 버틀러가 말하듯이 여자아이의 최초 사랑은 동성애적 대상이며, 이 여자아이에게 발하는 어머니의 금지규범은 우선 동성애적 사랑에 대한 금지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문제는 이러한 ‘당연한’ 사실을 바탕으로 동성애 금지가 근친상간금지보다 우선한다는 일반적인 결론을 유도할 수 있는가라는 점이다. 프로이트도 여자아이는 처음에는 ‘부정적 오이디푸스 콤플렉스’ 과정(즉 동성애)을 거친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프로이트와 버틀러가 달라지는 점은 정확히 무엇인가? 남자아이의 경우는 최초의 사랑이 동성애가 아니라는 점은 차치하고라도 과연 어머니와 여자아이의 최초 관계만을 근거로 동성애의 우선성을 말할 수 있는가?

        생후 초기 어머니에 대한 여자아이의 관계에서 젠더적 의미의 엄밀한 성구분을 논하기는 어렵다는 사실을 고려할 필요가 있다. 프로이트에 따르면 충동은 성구분을 갖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라깡의 프로이트 해석에 따르면 이 시기에 여자아이는 성정체성을 갖고 있지 않으며, 성구분을 알게 되는 것은 어머니가 아이 자신이 아니라 제3자인 아버지를 욕망하는 존재라는 것을 깨닫게 되면서이다. 「여자 동성애의 심리 발생에 관하여」라는 논문에서 프로이트가 밝혔듯이, 여자아이가 동성애자가 되는 것은 어머니를 거세된 존재라고 생각하고 아버지를 사랑의 대상으로 선택했지만 아버지로부터 거절을 당하고 최초의 사랑 대상(어머니)로 돌아가기 때문이다. 즉 엄밀한 의미의 동성애를 논할 수 있는 것은 아버지가 개입하지 않은 이자관계에서가 아니라 제3자의 개입과 더불어 생긴 좌절과 분노의 극복을 위해 다시 어머니로 돌아간 후이다.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를 거친 이후에 사후적으로만 우리는 어머니와 여자아이의 관계를 엄밀한 의미의 동성애로 정의할 수 있다는 것이다.

        생후 초기의 어린아이는 성구분을 가지고 있지 않은 주체이므로 최초의 여자아이가 이미 동성애적 사랑을 하고 있다고 말하는 것은 정신분석 이론을 너무 단순화할 뿐만 아니라 이미 주어져 있는 남녀의 대칭구도를 전제하는 것이다. 아이에게 동성애라는 것이 의미를 가지기 위해서는 이성애 개념이 생기고 난 이후이다. 바로 여기에서 프로이트의 사후성의 논리는 중요한 역할을 한다. 프로이트·라캉적 관점에 따르더라도 주체의 성적 정체성 성립에서 동성애가 ‘발달적으로 볼 때’ 이성애에 선행한다고 말할 수는 있겠지만 동성애가 개인적, 사회적으로 유의미한 주체적 입장으로 뿌리를 내리기 위해서는 주체가 이성애적 구조에 직면할 것이 필요하다. 이렇게 본다면 동성애와 이성애는 공시적으로 작용하면서, 각 주체를 동성애 혹은 이성애자로 이끌어가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어머니가 여자아이를 양육하는 최초의 인물이기 때문에 여자아이의 최초 사랑 대상은 동성이라는 설명만으로 ‘동성애의 우선성’을 정당화할 수 없다. 물론 버틀러 역시 이 점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그녀는 궁극적으로 ‘이성애는 동성애 금지를 전제한다’라는 ‘형식 논리적’ 방식으로, 즉 ‘연역적’ 방식으로 동성애의 우위를 정당화하고자 한다. 하지만 이러한 형식논리적인 연역적인 방식이 아니라 보다 구체적으로 동성애의 우선성을 증명하지 않는다면 버틀러의 입장은 크게 설득력을 얻지 못할 것이다. 왜냐하면 ‘동성애는 이성애 금지’ Ibid., p.149 참조.를 전제한다는 연역적 논리도 같은 무게의 설득력을 가질 수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버틀러는 동성애의 성립 배후에는 애도되지 않은 이성애가 있을 수 있다는 가능성을 완전히 부정하지 않는다. Ibid., p.148 참조.
        여기에서 우리는 ‘동성애적 실천이 존재한다는 사실이 이성애의 우선성을 증명한다’라고 주장하려는 것은 물론 아니며, 단지 버틀러의 논증의 ‘형식주의적’ 성격을 강조하고 있을 뿐이다. 따라서 버틀러가 동성애의 배척이라는 개념을 사용한 것도 우연이 아니다. 그것은 현실적으로 발생한 사건이 아니라, 이성애가 성립하기 위해 ‘논리적으로’ 전제되어야 할 사건이다. 이렇듯 “동성애의 가능성의 배척”이라는 버틀러의 표현도 버틀러 논의의 형식주의적 성격을 보여준다. 따라서 우리는 ‘동성애의 우선성’을 증명하기 위해 노력하기 보다는 이성애와 동성애를 모두를 주체가 택할 수 있는 가능한 실존 형태로 간주하는 것이 더 ‘민주적이고 다원적인’ 접근 방식이 아닌가 한다. 프로이트와 라깡은 동성애와 이성애 중 어느 하나에 특권적 위치를 부여하지 않았으며, 모두 개별적으로 설명해야 할 대등한 실존적 위치로 간주했다. 반면 버틀러의 입장은 성적 본질주의를 비판하면서도 (여자) 동성애에 특권적 지위를 부여한다는 모순에 빠진다.  

        둘째, 버틀러의 논의에서 남자아이는 어떻게 이성애자가 되는가? 여자아이의 경우와 달리 남자아이의 최초의 사랑 대상은 동성이 아니라 이성이므로 남자 이성애가 되는 과정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약간’ 다른 논리가 필요하다. 버틀러에 따르면 여자아이와 달리 남자아이는 최초의 사랑 대상을 상실한 후, 그것과 동일화하기를 거부한다(왜 공교롭게도 남자아이는 ‘멜랑콜리적 동일화를 거부하는가?). 즉 남자아이는 여자가 되기를 거부함으로써(어머니와의 동일화를 거부함으로써) 이성애자가 된다. “그는 그가 결코 되려고 하지 않았던[동일화하기를 거부했던] 여자를 원한다.” Ibid., p.137. 남자아이는 여자가 되기를 거부함으로써 이성애자가 되어 여자를 욕망의 대상으로 삼는다.

        하지만 남자는 여자가 되기를 거부하기 때문에 여자를 욕망하면서도 그녀를 두려워한다. 따라서 남자는 “남자와 여자의 다른 점을 구구절절 이야기하기 위해 노심초사한다. 그리고 그는 그[남자와 여자의] 차이를 발견하고 증명하기 위해 노력할 것이다. 그의 욕망은, 그가 욕망하는 것[여자]이 될지도 모른다는 공포에 휩싸여 있다. 그의 욕망은 일종의 공포이다.” Ibid.

        이렇듯 “남자는 여자와 동일화하기를 거부하고, 따라서 다른 남자를 욕망하지 않을 것이다.” 이어서 버틀러는 이렇게 말한다. “이러한[동성애적] 욕망의 포기는…금지의 힘 아래에서 남성성과 동일화함으로써 동성애를 병합한다(incorporate) 여기에서 incorporate은 프로이트가 「애도와 멜랑콜리」에서 사용한 einverleiben에 정확히 상응하는 용어이다(저자 주).. 그러나 이러한 남성성은 그것이 애도할 수 없는 사랑에 의해 사로잡혀있다.” Ibid., p.137-138. 여기에서 볼 수 있듯이 버틀러에 따르면 남자도 그가 다른 남자를 사랑했으며, 애도했다는 것을 부인함으로써, 즉 “이중의 부인”을 통해 ‘정상적인’ 이성애자가 된다. 버틀러에 따르면 남자는 우선 여자가 되는 것을 거부한다는 점에서 차이가 날 뿐 남자 역시 동성애적 사랑을 부인함으로써 이성애자가 된다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여기에서 남자 이성애의 성립에 관한 버틀러의 설명은 여자 이성애의 성립에 관한 설명과는 ‘상당히’ 다른 점이 있다는 것을 간과할 수 없다. 여자의 경우에는 어머니에 대한 사랑을 포기한 후 그녀와 동일화(멜랑콜리적 동일화)함으로써 이성애자가 된다. 반면 남자의 경우 우선 남자는 (동성이 아니라) 이성을 사랑했으나, 이 사랑 대상을 포기한 후에도 그녀와 동일화하기를 거부하며(이 차원에서는 버틀러의 멜랑콜리적 동일화가 작동되지 않는다!) 이러한 거부를 통해 이성애자가 된다. 여기에서 볼 수 있듯이 남자의 경우에는 동성애적 사랑 대상과 동일화함으로써 이성애가 되는 것이 아니라, 이성애적 사랑 대상(여자)과 동일화하기를 거부함으로써 이성애자가 된다. 하지만 앞에서 보았듯이 동시에 버틀러는 남자도 동성애적 사랑 대상을 포기한 후 그와 동일화함으로써 이성애자가 된다는 ‘이중의 부인’을 논리를 제시한다. 이러한 서로 다른 두 설명이 사실상 모두 가능한 것처럼 보이는 이유는 무엇인가? 남자가 최초 사랑 대상(어머니/여자)을 포기했지만 여자와 동일화(여자가 되기)를 거부한다는 것 자체가 이미 그는 이성애자가 된다는 것과 ‘논리적으로 같은’ 이야기이며, ‘당연히’ 동성애자가 되기를 거부한다는 것을 (논리적으로) 함축하기 때문이다. ‘형식 논리적’으로 본다면 남자가 여자가 되기를 거부하는 것(즉 이성애적 사랑 대상과 동일화하기를 거부하는 것)은 이성애자가 된다는 것과 사실 같은 말이며, 이것은 ‘당연히’ 동성애를 포기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버틀러는 이러한 ‘형식주의적 논리’를 바탕으로 남자 이성애자에게도 ‘이중의 부인’이 발생했다고 잠정적으로 결론내릴 수 있었지만, 하지만 사실 여기에서 버틀러는 보다 구체적으로 논의를 진행해야 할 필요성을 회피하고 있다. 버틀러는 이렇게 말한다. “나는 경험적 주장을 하거나, 젠더, 성, 혹은 멜랑콜리에 관한 현재의 정신분석 학계의 논의를 개관하려는 시도를 하지 않겠다.” Ibid., p.138.

        남자아이에 대한 버틀러의 주장을 요약하면 남자아이는 동성애자가 되지 않기 위해서 최초의 사랑 대상(어머니)과 동일화하기를 거부한다는 것으로 귀결된다. 여기에서 볼 수 있듯이 버틀러는 ‘동성애 금지’를 가장 근원적인 규범으로 간주하고, 어떤 상황에서든 동성애 금지가 가장 우선적인 금지규범이라는 것을 ‘형식 논리적’으로 ‘연역’하며, ‘선험적 법칙’으로 승격시키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선험적 법칙으로 승격시킨다.

        구체적 논의를 회피하는 버틀러의 형식주의적 이론에서 빠져 있는 것은 무엇인가? ‘왜 남자아이는 사랑 대상인 어머니를 포기하는가’라는 것이다. 왜 남자아이는 사랑 대상인 어머니를 포기하는가? 근친상간금지 때문에? 동성애 금지 때문에? 이성애적 규범을 받아들이기 때문에? 버틀러의 논의에 따르면 이 질문은 대답불가능하다. 버틀러는 적어도, 남자아이가 어머니를 포기하는 것은 근친상간금지 때문이라고 대답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여기에 동성애 금지가 이성애적 근친상간 금지보다 ‘더 근원적인’ 금지라는 자신의 논제가 들어설 여지가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적어도 우리는 남자아이가 어머니를 포기해야 해야 하는 것은 이성애적 근친상간이 금지되었기 때문이라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물론 더 정확히 말하면 오이디푸스 콤플렉스 상황에서의 금지는 이성애적 금지 혹은 동성애적 금지라는 표현보다는 이자관계의 금지(라깡)라는 구조적인 관점에서 더 잘 설명될 수 있다. 어쨌든 분명한 것은 구체적으로 논의를 진행할 때 남자아이가 어머니를 포기하는 이유를 동성애 금지라는 것으로 결코 설명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이성애적 성적 실천이 보편적인 것이 아니듯이 동성애적 성적 실천도 보편적인 것으로 승격시킬 수 없기 때문이다.

        셋째, 버틀러에 따르면 여자아이는 사랑 대상으로서의 어머니를 포기한 후 어머니와 동일화함으로써 이성애자가 된다. 그러나 이러한 논의는 라깡 정신분석을 단순화시키는 것이다. 예컨대 히스테리 환자는 상징적 차원에서는 남자와 동일화하고, 상상적 차원에서는 아버지가 좋아하는 여자와 동일화한다. 라깡의 ‘아름다운 정육점 주인의 부인’에 대한 분석에서 볼 수 있듯이 그녀는 남편의 팔루스에 상징적으로 동일화할 뿐만 아니라, 남편이 좋아하는 자기의 여자친구와 상상적으로 동일화해 남편의 욕망에 대해 질문하는 주체이다. 버틀러 이론에는 이러한 다양한 동일화를 구분하지 않고 여자 동성애는 어머니와 동일화한다라는 식으로 논의가 단순화되어 있다. 이러한 맥락에서 버틀러가 말하는 레즈비언적 팔루스 개념도 애매하다는 사실을 지적할 수 있다. 버틀러는 프로이트와 라깡이 말하는 팔루스를 패러디한 이 개념을 통해, 여자도 ‘이미’ 팔루스를 가지고 있으므로 남근선망을 더 이상 가질 필요가 없으며, 반대로 남자가 팔루스가 없는 존재일 수 있으므로 남자가 오히려 남근 선망을 가질 수도 있다는 논제를 제시하고자 한다. 이러한 논제 자체는 물론 타당하다. 레즈비언적 팔루스라는 개념 자체가 이미 라캉이 말하는 팔루스는 생물학적 기관이 아니라 기표라는 점을 더욱 부각시킨다는 점에서 버틀러의 여성주의는 라캉적 정신분석과 맥을 같이한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바로 그러한 이유로, 라캉적 팔루스 개념을 비판하고 이것을 대체하는 레즈비안적 팔루스 개념이 반드시 이론적, 실천적으로 필요한지에 대해서는 여전히 의문이 남는다. 남자가 팔루스를 가지지 못한 존재라면 여자 역시 팔루스를 가지지 못한 존재라고 보아야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버틀러 이론에서는 사실상 남자가 아니라 여자가 팔루스를 가지고 있는 것으로 전제되어 있다.

        정신분석은 거세당한 아버지, 팔루스를 가지고 있지 못하다고 느끼는 남자(히스테리 남자), 그리고 팔루스를 가진 어머니, 혹은 ‘남자가 갖고 있지 못하기 때문에 줄 수 없는 것(팔루스)을 여자에게 주고자 하는 여자 동성애자(라캉)’ 같은 개념을 이미 오래 전부터 이론화했으며, 남자 동성애와 여자 동성애를 구분하는 성이론을 발전시켰다. 이를 바탕으로 라깡은 남자들의 지배질서를 고유한 의미의 성도착(어머니의 거세의 부인)에 의해 지배되는 도착증적 질서로 파악해 이를 비판했으며, 반면 여자들의 동성애는 고유한 의미의 동성애라기보다는 팔루스적 질서에 대항하는 실존 방식으로 설명했다. 즉 여자 동성애자는 레즈비안적 팔루스를 향유하는 주체가 아니라 팔루스적 질서에 종속하지 않는 주체만이 도달할 수 있는 ‘다른 향유’를 누리는 주체라는 것이다.  

        넷째, 남자 이성애자의 형성에 대한 버틀러의 설명에 대해 살펴보았으므로 이제 반대로 버틀러라면 남자가 동성애자가 되는 이유를 어떻게 설명할 것인지 질문해보자. 버틀러의 전제에 따르면 남자 동성애자는 여자와 동일화한 주체이다. 하지만 이러한 논의만으로 남자 동성애를 설명할 수 있는가? 프로이트의 「물신주의(절편음란증)」에 따르면 남자 동성애자는 ‘팔루스를 가진 어머니’라는 환상에 고착된 주체이다. 남자 동성애자가 이러한 환상을 가지고 있는 까닭은 한편으로는 어머니에 대한 사랑을 완전히 포기하지 않기 때문이다. 잘 알려져 있듯이 프로이트에 따르면 남자아이는 어머니에 대한 사랑을 포기하지 못하기 때문에 거세 불안이 발생하며, 거세 불안을 방어하기 위해 팔루스를 가진 어머니라는 환상을 발전시킨다. 팔루스를 가진 어머니는 어떤 어머니인가? 남자인가? 여자인가? 물론 남자 동성애자의 동성애 실천 대상은 남자이지만, 동성애자의 환상 속에서의 사랑 대상은 팔루스를 가진 어머니, 즉 ‘어머니이며 동시에 아버지’이다. 즉 버틀러에 따르면 남자 동성애자의 ‘열정적 애착’ 대상은 남자이겠지만(동성애자는 남자에 대한 “열정적 애착”을 부인하지 않는 사람이다), 프로이트에 따르면 그것은 ‘성구분이 명확하지 않는’ 사람, 즉 팔루스를 가진 어머니이다.

        여기에서 정신분석적 접근과 버틀러의 접근 방식이 달라진다. 버틀러는 성적 본질주의와 젠더라는 이데올로기적 경계를 무너뜨리고자 하지만, 그녀는 이미 사회적으로 주어진 젠더 개념만을 가지고 자신의 논의를 전개한다. 즉 버틀러는 이성애는 동성애를 배제하고, 동성애는 이성애를 배제한다는 식의 형식주의적 설명에 주로 의존해 동성애와 이성애를 설명한다. 하지만 이성애와 동성애를 말하기 위해서는 우선적으로 여자와 남자에 대한 정의가 선행되어야 할 것이다. 하지만 버틀러의 이론에는 남자와 여자에 대한 합리적인 정의(定意)가 사실상 존재하지 않으며, 이성애자와 동성애자라는 대립만이 있을 뿐이다. 버틀러가 말하는 성차이는 ‘상징적’ 차이이며, 따라서 그녀는 실재로서의 성차이라는 개념(라깡)에 도달하지 못하며, 성적 본질주의를 비판하면서 여자 동성애를 옹호하는 가운데 여자 동성애를 특권화시키는 또 다른 의미의 성적 본질주의에 경도되고 만다.



IV. 정신분석의 정치성

        정신분석의 목표는 사회적 적응, 행동의 통제, 혹은 정치적 효율성 등과 같은 사회 공학, 혹은 개인의 통제와 같은 ‘실용적 가치’가 아니라, 각 주체로 하여금 자신을 지배하고 있는 환상을 통과하게 함으로써 그 주체가 처해 있는 소외의 상태에서 벗어나도록 하는 것이다. 주체는 상징계에 들어오면 타자의 욕망에 의해 소외되는 욕망을 갖게 되는데, 이는 인간의 욕망은 타자의 욕망을 매개로 형성된다는 사실에 기인한다. 라캉이 논의하고 있듯이 주체는 상징계로 진입함으로써, 즉 타자의 욕망의 기표의 사슬에 얽매임으로써 자신의 향유를 상실한다. 상징계 속에서 주체는 타자의 욕망을 욕망하게 되는데, 이렇듯 소외란 환원할 수 없는 주체의 개별성을 (전능한) 대타자가 대신 정의해주는 것이라고도 할 수 있다. 따라서 주체는 자신을 규정하고 있는 타자의 욕망으로부터, 기표의 사슬로부터 벗어나야 한다.

        정신분석은 주체로 하여금 자신을 소외시켰던 기표의 사슬로부터 벗어나 자신의 환원할 수 없는 주체적 개별성, 혹은 상실했던 ‘존재’를 다시 획득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고 간략히 정의할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정신분석은, 주체를 대신해 주체의 정체성을 정의하고, 주체로 하여금 향유와 고유한 욕망을 앗아간 대타자를 폐기하고 그것의 비존재(대타자는 존재하지 않는다)를 확인하는 것으로 귀결되어야 할 것이다. 이는, 정신분석은 어떤 ‘객관적인’ 지식의 획득을 목표로 하고 있지 않다는 사실을 함축한다. 오히려 그 반대로 대타자가 가지고 있다고 가정되는 지식이 주체를 소외시켰다는 것을 알게되는 것을 의미하며, 주체는 분석을 통해 자신을 소외시켰던 주인(지배자)의 욕망과 향유로부터 벗어나 ‘자유’를 획득한다.

        정신분석의 끝에서 주체는 지금까지 환상(S/ ◇ a)  속에서 자신을 유지시켜주었던 대상 a 의 추락을 경험한다. 분석 상황의 관점에서 본다면―전이 관계 속에서―분석가는 분석주체의 대상 a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데, 이제 분석의 끝에서 분석주체는 분석가, 즉 안다고 가정주체의 추락(chute)을 경험하게 된다. 지금까지 환상 속에서 주체의 결여를 상상적으로 매워주던 역할을 하던 대상 a와 주체의 상상적 결합관계가 해체된다는 것이다. 지금까지 분석주체는 욕망의 대상·원인(대상 a)에 의해 결정되어 왔으면서도(혹은 타자의 욕망과 향유의 대상이었으면서도), 자신과 대상 a와의 관계에 대해 알지 못했고, 이러한 '무지'를 바탕으로 분석주체는 주체로서 자신의 고유한 정체성을 유지하고 있다고 믿어왔다. 분석의 끝에서 이제 그는 자신의 정체성이 궁극적으로 '한 조각 대상'에 지나지 않았음을 체험한다. 즉 주체는 자신이 무(無)에 지나지 않음을, 혹은 이 무를 채우는 ‘실재 속의 작은 대상’에 지나지 않음을 깨닫는다. 즉 분석주체는 ‘주체’가 아니라 ‘대상’을 ‘선택’하고, 이로써 “환상을 상실”(le déchoir de son fantasme)하며, “주체로서 궁핍의 상태로 들어간다”(le destitutue comme sujet). J. Lacan, Proposition du 9 Octobre 1967 sur le psychanalyste de l'École,  in: Autres Écrits, Paris: Seuil, 2001, p.252.

        하지만 라캉이 말하는, 분석의 끝에서의 주체의 궁핍(destitution du subjet)은 존재 결여가 아니라 존재를 산출한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주체적 궁핍은 비존재(désêtre)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존재(être)를 만든다는 것을 이해시키는 일이다.” J. Lacan, Discours à l'E.F.P. in: Scilicet 1, Paris: Seuil, 1970, p.21. 상상적 역할을 담당했던 대상 a가 주체로부터 떨어져 나가면, 즉 환상을 깨뜨리고 나면 주체는 환상의 배후에서 작용하고 있는 (부분)충동, 존재 혹은 실재를 만난다는 것이다. 분석의 끝에서 일어나는 경험을 다음과 같이 나누어 살펴보자. 분석의 끝에 관한 더 상세한 논의로는 홍준기, 「분석의 끝(목표): 환상의 통과, 주체적 궁핍, 증상과의 동일화―역자 해제」, 조엘 도르, 『프로이트·라깡 정신분석임상』, 아난케, 2005 참조.


1. 환상의 통과
        (1) 환상 속에서 주체는 타자 속의 결여를 대상 a로 채운다. 물론, 환상은 동시에 주체 자신 속의 결여를 상상적으로 메우는 역할도 한다. 어머니와 어린아이와의 관계에서 알 수 있듯이, 주체와 대타자는 (환상 속에서) 대상 a를 매개로 서로 완벽히 결합되어 있다고 상상한다. 대상 a는 상징계로 진입할 때 이미 상실해 회복할 수 없는 것이 되어버렸다는 것을 알지 못하면서 말이다. 이렇게 본다면 환상은 주체와 대타자 속에 모두 존재하는 결여를 상보적으로 채우는 것이다. 달리 말하면 환상은 주체와 대타자와의 만남이 궁극적으로 두 개의 결여의 만남에 지나지 않음을 은폐한다. 환상 속에서 주체는 대상 a를 통해 타자와 하나가 됨으로써 자신의 정체성을 유지했지만, 분석의 끝에서 지금까지 주체는 이를 알지 못했음을 깨닫는다. 따라서 대상 a의 추락의 경험으로서 분석의 끝의 경험은 자신의 정체성을 유지해주던 상상적 마개로서의 대상의 추락의 경험이며, 이 대상 a는 궁극적으로 대타자와 주체 자신 속에 존재하는 결여의 체현물에 다름아니라는 경험이다.
        
(2) 향유와 대타자 속의 결여의 기표{S(A/)}

        우리는 라깡이 말하는 환상의 통과를 『세미나 20권』에서의 성구분 공식과도 연결시켜 논의할 수 있다. 남자의 팔루스적 향유가 환상 속에서만 대상 a에 도달하는 향유라면(하지만 팔루스적 향유의 주체는 자신이 대상 a만을 만나고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한다), 여자의 향유, 즉 다른 향유는 S(A/), 즉 타자 속의 결여의 기표에 도달한다. 대타자의 결여의 기표에 도달한다는 것은, 대상 a를 결여의 체현물로서의 대상 a로서 인정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달리 말하면 결여의 인정이 다른 향유의 조건임을 받아들인다는 것인데, 이러한 ‘새로운 지식’을 통해서 주체는 자신에게 불안을 야기하던 치명적인 향유 혹은 팔루스적 향유에서 벗어나 다른 향유를 찾을 수 있다.

        분석의 끝에서 분석주체가 도달하는 향유는 라캉이 <세미나 20권>에서 다른 향유(jouissance autre) 혹은 보완적 향유(jouissance supplémentaire)로서 설명한 바 있는 여자의 향유를 의미한다. 정신분석의 끝에서 도달하는 향유는 필연적으로 결여의 차원을 포함함으로써만 주체를 해방시킬 수 있다.

        이렇듯 환상의 통과가 일어날 때 주체로부터 대상 a의 추락이 발생하면, 주체는 타자 속의 결여의 기표{S(A/)}에 도달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여기에서 다음과 같은 질문이 생길 수 있다. 환상을 통과한 후 주체는 환상이 충동으로 환원되는 경험을 하게 되는데, 왜 주체는 다시 타자의 결여의 기표에 도달하는가? 타자의 결여의 기표에 도달한다는 것은 여전히 실재에 다다르지 못하고, 상징계의 기표의 차원에 머무르는 것이 아닌가? 하지만 이러한 전형적인 들뢰즈적인 질문은 라캉 정신분석학의 핵심적 내용을 간과하고 있다.  

        또한 분석의 끝에서 환상을 통과한다는 것은 대상 a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분석가가 자신의 존재를 상실하는 것을 의미한다. 라캉은 분석의 끝에서 분석가는 탈존재(désêtre)를 경험한다고 쓰고 있다. 이 순간 지금까지 분석주체가 분석가와 맺어왔던 전이 관계가 해소된다. Jaques Lacan, Proposition du Octobre 1967...op. cit. p.252 참조. 전이 사랑은 나르시시즘적, 혹은 상호보완적이다. 분석가가 추락한다는 것은 상상적인 이러한 상호관계로부터 벗어난다는 것을 의미한다.

        환상을 통과하고 대상 a로부터 주체가 분리되면 환상에 의해 감추어져 있던 타자 속의 결여가 드러난다. 이를 달리 표현하면, 타자 역시 결여를 가지고 있는 존재라는 것, 즉 타자 속의 결여, 혹은 타자의 비존재성 혹은 타자의 비일관성(incosistance)을 발견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주체의 욕망을 끊임없는 환유적 운동으로 만들었던 (대)타자의 근친상간 금지 명령은 사실상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발견한다는 것이다. 주체가 어머니의 욕망과 거세를 발견한 후 그가 상실했다고 스스로 가정했던 완전한 향유는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다는 것임이 사후적으로 드러난다. 완전한 향유는 금지된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불가능했던 것이다. 그리고 환상은, (완전한) 향유를 금지하는 대타자를 설립함으로써 주체가 그 대타자 때문에 자신이 이전에 누리고 있었던 완전한 향유를 상실했다는 착각을 불러일으키는 역할을 할뿐이라는 것을 주체는 사후적으로 체험한다. 달리 말하면 상상적 거세와 대상 a가 분리되며, 주체는 대상 a는 대타자 속의 결여의 체현물에 지나지 않았다는 것, 그리고 주체의 충동이 대타자 속의 결여를 채우는 역할을 하고 있었다는 것을 발견한다. 환상의 통과 이전에 대상 a의 지위와 환상의 통과 후의 대상 a의 지위를 우리는 헤겔의 『정신현상학』에서의 논의와 연관시켜 각각 대타적 존재 대상 a, 그리고 즉자 (대자적) 존재로서의 대상 a로 나누어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라캉은 이와 관련해 분석적 행위에서 분석주체는 “대상 a의 즉자(l'en-soi de l'objet a)”로 “환원된다”고 말한 바 있다. J. Lacan, l'acte psychanalytique, comptes rendus, in Ornicar? n°29, Paris, p.18. 환상을 통과함으로써 주체는 사후적으로 대타자의 비존재, 혹은 타자 속의 결여를 발견한다. 환상의 통과란 지금까지 주체로부터 너무 많은 향유를 요구했던 대타자를 사후적으로 폐기하는 행위, 대타자의 비일관성을 증명하는 행위를 의미한다. 그리하여 주체는 대타자에로 환원될 수 없는 향유, 실재, 존재에 접촉하는 것이다.

2. 주체적 궁핍(destitution subjective) : 존재의 발견으로서의 주체적 궁핍

        주체가 대타자 속의 결여의 기표를 발견한다는 것은,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주체가 자아의 이상으로서의 대타자의 욕망의 대상으로서 인정받기를 욕망하기를 포기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대타자를 사후적으로 폐기한다는 것은, 대타자로부터의 인정의 욕망을 거부한다는 것, 그리고 이를 위해서는 주체가 타자와의 교환이 불가능한 자신만의 개별적, 주체적 향유를 추구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앞으로 다시 논의하겠지만 이는 증상과의 동일화라는 주제로 넘어가게 한다. 정신분석적 행위에 관한 세미나에서 라캉은 “무의식이 존재한다는 것은 주체 없는 지식이 존재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Ibid., Paris, p.19.고 말한다. ‘주체 없음’이란 물론 “주체의 궁핍”, 즉 대상 a로 축소된 주체의 상태를 의미하며, 이때 주체 없는 지식이란 동시에, 대타자의 비존재성에 관한 지식을 의미한다. 라캉은 말한다. “지식, 그것을 발명해야 한다.” J. Lacan, Notes italiennes in Ornicar? n°25, Paris, p.10. 이 지식은, 주체가 타자의 지식(S2)를 통해 자신을 대리하지 못한다는 것, 즉 대타자의 비존재성을 드러내는 (새로운) 지식으로서 라캉은 대타자의 비존재를 S(A/)로 공식화한다. ”…타자의 타자는 존재하지 않는다. 혹은 …메타언어는 존재하지 않는다.…이것이 우리의 그래프의 S(A/)이다.“ Ibid., p.19. 달리 말하면 이는 S1과 S2 사이의 분리를 의미한다. 신경증 환자는 주체의 궁핍을 거부함으로써 새로운 주체의 도래를 체험하지 못한다. 신경증 환자는 새로운 주체의 도래를 알리는 S1의 출현을 거부하고 S2(대타자, 혹은 대타자의 지식)에 의존한다.

3. 증상과의 동일화

(1) 분석가의 개입: 정신분석적 행위

        “증상은 실재적이다. 그것은 심지어 진정으로 실재적인 유일한 것이다. 즉 그것은 실재 속에서 의미(sens)를 보유하고(conserve)하고 있는 유일한 것이다. 이것이 정신분석가가 실재 속에서 증상을 해소하기 위해 상징적으로 개입할 수 있는 이유이다.” J. Lacan, Vers un signifiant nouveau, in Ornicar?, p.9. 이렇듯 때때로 라캉은 향유와 의미를 연결시킨다. 향유는 향유된 의미(jouis-sens, sens joui)이다. 그리하여 라캉은 향유(즉 실재)와 실재가 완전히 분리되어 있는 것이라면 “정신분석은 아마도 사기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Ibid.고 말한다. 왜나하면 그렇다면 정신분석가가 증상을 해소하기 위해 상징적으로 개입하는 것이 원천적으로 봉쇄되고 말기 때문이다. 주체로 하여금 증상 속에서 (숨겨진 무의식적) 향유를 향유하도록 만드는 말의 효과를 라캉은 “의미효과”(effet de sens) Ibid.라고 부른다. 쉽게 말하면, 주체는 은유로서의 증상의 숨겨진 의미를 향유한다는 것이다. 라캉에 따르면 분석가의 행위, 즉 해석적 행위가 효력을 발휘할 수 있는 것은 증상 속에서 주체가 누리는 향유가 의미효과로서 발생하기 때문이다. 즉 향유는 향유된 의미(jouis-sens, sens joui)이다.

        하지만 라캉에 따르면 실재와 의미(sens)는 궁극적으로는 서로 배제한다. “실재에 관한 진리는 없다. 왜냐하면 실재는 의미를 배제하는 것으로서 자신을  드러내기(se dessiner) 때문이다.“ Ibid., p. 9. 실재는 존재의 질서에 속하며, 의미는 상징계의 작용으로부터 생겨나므로 실재와 의미는 서로 배척할 수밖에 없다. 따라서 증상 속에 존재하는 향유는 ‘궁극적으로’ 모든 의미를 넘어서 있는 것이다.

        따라서 분석가의 해석, 즉 정신분석적 행위는 분석주체로 하여금 기표의 작용에 의해 생겨난 의미효과로부터 단절할 수 있도록 해야한다. 즉 분석가의 해석적 행위는 S1과 S2 사이의 단절을 낳는 ‘새로운 의미’, 즉 “sens-blanc” Ibid., p.19.을 도래하게 만들어야 한다. “의미의 타격”(coup de sens), 즉 sens-blanc”으로서 분석가의 해석적 행위 Ibid.는 주체로 하여금 언어를 통해서는 도달할 수 없는 어떤 확실성의 지점에 도달하게 한다. 언어의 이러한 불가능의 경험을 통해 주체 효과가 생겨난다. 바로 이것이 증상과의 동일화로서의 실재의 효과이며, 곧 주체 효과이다.

        분석의 끝으로서의 증상과의 동일화가 의미하는 것은, 실재(향유)와 의미의 결합의 불가능성의 경험이다. 분석의 끝에서 타자는 존재하지 않고 주체―“일자”(Un)―만이 존재한다. Ibid., p.18. 주체라는 일자를 구성하는 향유는 개별적인 것으로 타자와 교환이 불가능한 향유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고독 속에서 누리는 ‘무의미’로서의 향유이다. 주체는 존재하지 않는 대타자 속에서의 고독(solitude)을 감내하며, 상징화될 수 없는 향유의 무의미를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2) 증상과의 동일화

        여기에서 ‘증상과의 동일화’의 의미가 드러난다. 증상과의 동일화란, 주체가 증상 속에서 실현되고 있는 부분충동의 만족을 중시한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말하는 증상이란 더 이상 없어질 수 없는 증상(sinthome)를 의미한다. 향유의 집적체로서의 증상에서 주체는 이제 타자와 교환 불가능한 향유를 누리고 있다. 이러한 의미에서 환상을 통과한 주체는 충동 혹은 향유에서 자신의 양도할 수 없는 고유한 개별성에 도달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분석의 끝은 주체로 하여금 실재를 드러내는, 달리 말하면 불가능성으로서의 실제를 체계적으로(비트겐슈타인적 의미에서) 보여주는 새로운 상징계의 건설로 나아갈 수 있도록 한다.
        
4. (정신분석적) 행위의 정치성

        행위는 라캉 정신분석에서 중심이 되는 개념 중의 하나로서 라캉은 이미 『세미나 15권: 정신분석적 행위』에서 이에 대해 언급한 바 있다. 행위는 ‘궁극적으로’ 주체의 행위로서, ‘집단’의 행위가 아니라 오히려 집단의 압력에 반대하는 주체적, 개별적 참여행위를 의미한다. 하지만 라캉이 말하는 행위는 자아 혹은 의식에 의해 지배되는 능동적 행위, 혹은 자아가 완전히 통제할 수 있는 행위가 아니다. 행위는 다음과 같은 세가지 어원적 의미를 갖는다. Marie-Jean Sauret 2000, Psychanalyse et Politique, presse universitaires du Mirail, p.156ff. 참조. 첫째, 법적 차원에서, 그것은 구두적 절차, 법, 명령, 결정 등을 의미한다. 불어에서 'prendre acte de'는 법적으로 인정하다. 확인하다. 적어두다라는 의미를 가지며, 이때 acte는 주로 상징적 차원과 연관되어 있다. 둘째, 명시적으로 ‘말’(parole)과 반대되는 것으로서의 행위, 업적, 공적 등을 의미하며, 이는 실재적 차원을 지시한다. 셋째, 연극에서의 행위라는 의미를 가질 수 있다. 연극적, 극적인 행위, 극적 재현(représentation thêatale)을 뜻하는 경우, 이는 상징적 차원과 관련되어 있고, 가상(semblant)이라는 함의를 가질 때는 상상적 차원을 지시한다.

        라캉에서 분석의 끝, 혹은 정치적 함의를 가장 풍부하게 담고 있는 것은 실재적 행위의 차원에 위치하는 행위이다. 실재적 행위는 분석의 끝에서 일어나는 행위로서 대타자의 존재를 폐기하는 행위를 의미한다. 이 점에서 실재적 행위는 신경증적 ‘행동화’(acting out), 정신병적 ‘행위로의 이행’(passage à l'acte), 상징적 질서를 사후적으로 자신의 작품으로 받아들이는, 혹은 주어진 규범에 따라 상징적 질서의 흐름에 기여하는 상징적 행위, acte manqué(실수로 발생한 행위), 그리고 자신을 타자의 향유의 도구로서 제공하는 도착적 행위와는 다르다.

        또한 실재적 행위로서의 행위는 탈동일화가 아니다. 주체는 특정한 지배자와 탈동일화를 함으로써 오히려 사회적 이데올로기(그리고 이를 지탱해주는 근본적 환상)에 참여할 수 있다. 예컨대 특정 정당 혹은 정치 지도자에 대해 비난하고 그와 거리를 둠으로써 주체는 오히려 ‘비판에 열려 있는 그 민주적인 정당’의 특정 이데올로기를 지지할 수 있다. 그러므로 정치적으로 진보적인 주체의 태도는, 동일화의 문제가 아니라 근본 환상에 대해 작업하는 것이어야 한다.

        실재적 행위는 무엇보다도 자신의 가장 귀중한 것을 공격하는 것으로부터 출발하며, 필연적으로 이는 정치적 급진성을 가진다. 소외된 상태에 빠져있는 주체의 욕망과 향유는 필연적으로 상징적 맥락에서 형성되며, 따라서 그것은 이데올로기적 향유와 결코 무관하지 않다. 그러므로 진정한 행위는, 사회적 맥락에의 적대와 관련해 사회적, 정치적 정세의 균형을 교란시키는 것을 목표로 자신을 투입하는 행위이고, 진정하지 않은 행위는 사회적 균형의 지속적인 유지에 봉사한다. S. Zizek, Class Struggle or Postmodernism? in J. Butler/E. Laclau/S. Zizek (ed.), Contingency, Hegemony, Universality, London/New York: Verso, p.125 참조.

        그렇다면 이제 행위가 ‘아닌 것’을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을 것이다. 행위는 효율성에 의해 평가되지 않으며, 반사적 행동이 아니다. 예컨대 생물학적 반작용은 행위가 아니다. 또한 행위는 단순히 상징적 한계를 단순히 넘어서는 것, 혹은 위반이 아니라, 오히려 상징적 한계를 넘어서라는 명령을 거부하는 것이다. 예컨대 상징적 한계를 넘어서라는 상부의 명령을 거부하는 것이 행위이다. 이는, 성도착자의 위반의 행위가 진정한 행위가 아니라 오히려 대타자의 법을 유지시켜주는 역할을 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또한 단순한 공적이나 뛰어난 성과를 동반한 행동(performance)도 행위가 아니다. 정신병리적 소외의 극복을 위해 정신분석작업을 하는 것을 통해 행위에 도달할 수 있으나 정신분석작업이 오히려 주체를 소외로 이끄는 경우도 생길 수 있다. 또한 ‘확립된’ 도덕을 존중하는 것도 행위로 기능하지 않는다.

        요컨대, 행위는 어떤 이상, 대의(Cause)에 충실한 행위로서 이를 위해 자신의 가장 귀중한 것을 포기할 수 있는 행위를 말한다. 라캉이 자살을 성공한 행위로 간주한 적이 있는데, 이는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진정한 행위는 이성적 타산(calculation) 혹은 추론의 결과가 아니다. M.-J. Sauret, op. cit., p.157ff. 참조. 대의(Cause)를 인식하면서, 상징적 지배 질서를 바탕으로 근거와 이유를 제시하지 않는 고독한 행위로서 진정한 행위는 결과를 자신의 책임으로 받아들이면서 원인(대의)의 존재를 승인하며 이것에 충실한(fidèle) 것이다.

        이러한 행위는 홀로, 고독하게 이루어지지만, 그것은 필연적으로 정치성을 가진다. 행위란, 주체 속에는 대타자(정치, 기표의 질서, 상징적 질서, 권력 등)에 의해 결정되지 않은 것이 있으며, 바로 그 때문에 발생할 수 있는, 주체가 수행할 수 있는 가장 지고의 것이다. 행위는 어떤 신비적인 고행이나 황홀경으로의 침잠이 아니라, 개인의 주체성의 관점으로부터 출발해 어떤 사회적 영역으로 개입해 대타자를 폐기함으로써 새로운 대타자의 설립을 목표로 삼는 정치적 행위이기도 하다. 많은 논자들이 있지만 라깡의 행위 개념을 정치적 관점에서 재해석한 사람으로 물론 지젝을 빼놓을 수 없다. 지젝의 행위 개념에 관해서는 홍준기, 「슬라보이 지젝의 포스트모던 문화분석」, 『철학과 현상학 연구』, 제22집, 2004 봄, 한국현상학회, 특히 pp.214 이하 참조.
  
        라캉에 따르면 오직 하나의 증상, 즉 하나의 사회적 증상만이 있을 뿐이다. 개인적 증상은 모두 사회적 증상이라는 것이다. 이는 정신분석에 말하는 증상은 사회의 증상과 ‘유비적’ 관계에 있다는 것이 아니라 정신분석에서 말하는 증상이 곧 사회적 증상이며, 정신분석의 끝은 단순히 개인적 차원에서가 아니라 사회적 차원을 갖는다는 것, 즉 사회적 소외로부터의 극복이라는 사실을 함축한다. 분석을 통해 대타자 속에 자리 잡을 수 없는 이러한 주체적 증상과 동일화하고, 옛 대타자를 폐기하며 이 ‘고독한’ 증상을 ‘새로운’ 상징계의 건설을 통해 보여주는(비트겐슈타인) 과정은 정치적 과정 그 자체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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